대기업 부장까지 지내다 직원 20여명 규모 중소기업 임원으로 옮긴 송모(46)씨. 그는 최근 사장과 면담에서 “일을 줄여줄 테니 ‘파트 타임’으로 일했으면 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상 ‘연봉을 줄이고 싶다. 회사를 나가달라’는 의미였다. 그는 “명예는 고사하고 희망조차 전혀 반영 안 되는 ‘불명예 퇴직’ 권고”라며 “중소기업이라 (대기업처럼) 하소연할 방법도 마땅찮다”고 털어놨다. 사장이 퇴사로 떠밀다 보니 주위 동료 시선도 몰라보게 차가워졌다. 그는 “이직하려고 해도 경력을 더 채워야 유리해서 일단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 ‘허리’인 40~50대 중장년층 직장인에게 부는 ‘권고사직’ 칼바람이 매섭다. 경기 불황을 맞아 이런 기류가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대기업이다. 하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중소기업도 체감 온도가 차갑다. 삼성전자 인사팀장(전무)을 지낸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시절 불어닥친 ‘사오정(45세 정년)’에 빗대 “저성장 추세와 40·50대 퇴사가 맞물린 ‘신(新)사오정’ 시대가 왔다”고 진단했다.
11일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올해(이하 상반기 말 기준) 40~50대 실직자(1년 내 퇴사) 중 ‘비자발적’ 실직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50.8%로 나타났다. 2014년 42.3%에서 10년 새 8.5%포인트 늘었다. 전체 연령대에서 비자발적 실직자가 차지하는 비중(44.4%)보다 6.4%포인트 높다. 비자발적 실직은 직장의 휴업·폐업, 명예퇴직·조기퇴직·정리해고 , 임시·계절상 일자리 종료, ‘일감이 없어서’ 또는 사업 부진 등 사유로 퇴사한 경우다. 다시 말해 4050 실직자 절반이 의사와 무관하게 ‘떠밀려서’ 직장을 그만뒀다는 의미다.
4050의 비자발적 실직 중에서 흔히 권고사직으로 일컫는 ‘명예퇴직·조기퇴직·정리해고’ 사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년 새 12.3%에서 18.8%로 6.5%포인트 늘었다. 전체 연령대에서 같은 기간 8.7%에서 12.7%로 4.1%포인트 증가한 것보다 상승 폭이 크다.
실제 최근 굴지 대기업에선 명퇴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KT는 8일 자로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대상 인원은 2800명. KT 전체 임직원의 6분의 1에 달한다. 포스코는 지난달 초 만 50세, 직급 10년 차 이상 사무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이마트는 지난 3월 창사 이래 처음으로 근속 15년 이상, 과장급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SK온ㆍLG헬로비전ㆍ롯데홈쇼핑 등도 출범 후 처음 희망퇴직을 받았다. 시중은행 4050 희망퇴직 접수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삼성전자조차 올해 연말까지 해외 계열사를 중심으로 최대 30% 인력 감축을 추진 중이다.
대기업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퇴직자를 위해 희망퇴직을 공고한 뒤 재취업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거나, 위로금까지 얹어주는 경우가 많아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언감생심이다. 올해 초 중소기업에서 퇴사한 김모(53)씨는 “대기업을 다닐 땐 인사규정도 있고, 노동조합 때문에 회사가 함부로 퇴사로 떠민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며 “중소기업으로 옮기니 너무 손쉽게 ‘회사 사정이 나쁘니 부장급 이상은 나가달라’ 식으로 통보하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재취업하려면 평판을 신경 써야 하니 노동청에 신고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기업이 ‘사오정’ 퇴직을 밀어붙이는 배경은 경기 침체에 따른 실적 부진이 첫손에 꼽힌다. 예를 들어 포스코의 경우 업황 부진에다 중국산 저가 철강 제품의 공세로 인해 실적 압박에 시달린다. 올해 3분기 매출(9조4790억원)과 영업이익(4380억원)이 전년 대비 각각 2.0%, 39.8% 줄었다. KT의 경우 인공지능(AI) 사업 확대를 위해 기존 통신 선로 설계 및 서비스 인력을 감축하는 과정에서 희망퇴직을 받았다.
여기에 연공서열형 임금 구조라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근속 연수가 10년에서 20년으로 늘 때 한국 근로자의 평균 임금상승률은 15.1%로 나타났다(2019년 기준). OECD 28개국 중 가장 높다. 평균 임금 상승률(5.9%)은 물론 미국(9.6%), 일본(11.1%)과 대비된다.
경제가 한창 성장할 때는 상관없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자 기업 입장에선 4050이 회사 경영에 부담스러운 인력이 됐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데다 전체 회사 인력 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기 때문이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4050이 주축인 고비용, 역(逆) 피라미드 인력 구조로 바뀐 사업 환경에 빠르게 대응하기 어렵다”며 “꾸준히 희망퇴직을 진행해 분위기를 쇄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요셉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상승 기울기가 가파를수록 기업이 4050 근로자의 조기 퇴직을 유도하려는 경향이 커진다”고 말했다.
문제는 한 번 주된 직장에서 밀려난 4050이 재취업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재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취업의 질이 떨어진다. 중장년 노동시장의 일자리, 그중에서도 고임금·고숙련 일자리가 부족해서다. 경기도의 한 일자리지원센터 관계자는 “4050 사무직 출신이 생산직으로 재취업하기가 쉽지 않다”며 “이들이 원하는 임금 수준과 기업이 제시하는 금액이 차이가 큰 데 따른 미스매치(불일치)도 발생한다”고 전했다. 김승택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050 비자발적 실직자는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이중구조에서 모두 하층부로 밀려나다 결국 정년보다 빨리 노동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45세는 외환위기 시절과 달리 한창 일할 ‘청년’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주민등록인구상 중위 연령(전체 인구를 한 줄로 세웠을 때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나이)이 올해 말 처음 45세를 넘길 전망이다. 2014년 말 처음 40세를 넘긴 지 10년 만에 5세가 늘었다. ‘사오정’ 얘기가 처음 나온 IMF 외환위기(1997년) 시절 중위연령은 30.3세였다.
이아영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산업·직종의 생성과 소멸 속도가 빨라져 신사오정의 재취업이 어려워졌다”며 “개인이 아닌 사회 문제고, 앞으로도 확산할 추세”라고 진단했다. 이어 “준비 안 된, 비자발적 퇴직을 준비된, 자발적 퇴직으로 유도하고 퇴직 후에는 적정 소득을 이어갈 수 있는 일자리로 재취업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출처 : 중앙일보 김기환, 나상현 기자(202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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